080303 ㅣ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March 4, 2008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래 정부가 많은 사회복지정책과 사업들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 모두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신이 우리를 돌봐줄 것이라는 신앙심이 부족했다.최근 들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에 관한 대처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양극화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부분의 논의는 문제 제기나 원인 분석 수준에 그치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를 이념의 수준에서만 보고 있을 뿐 신이 우리를 돌볼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극적 실천력을 찾아볼 수 없다.
애국가 가사에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매번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하느님이 보우한다는 믿음을 얼마나 가졌던가 생각해볼 일이다.
- 김성이, [국민일보 논단] 사회복지정책과 믿음, 2007년 05월 30일 중
한겨레, "신앙심 부족해 복지정책 실패", "복지병 문제"
2008년 03월 04일, 에서 재인용.
- 요즘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철학 사조가 정치 신학 Political Theology다. 좌파의 시각에서 다시 읽는 정치로서의 신학은 흥미롭다. 데리다가 벤야민을 다시 읽은 것을 필두로, 아감벤이 슈미츠를 다시 읽고,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복지장관께서는 복지의 고장인 유럽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시는 듯. 문제는 기반이 갖춰진 유럽에서 오고가는 정치신학이 새로운 정의를 위한 대안의 모색이라면, 이 사설에서는 '기반'의 '기'자도 - 아니지, '실용주의'식 용어로다가, '퐈운뒈이숀'의 'ㅍ'도 찾아볼 수가 없다.
- 기반의 차이에는 최근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가 공식적으로 제기한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영국의 국교는 아직 공식적으로 '성공회', 물론 종교의 자유는 완전 보장된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국교의 수장으로써, 성공회뿐 아니라 영국에 존재하는 종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얼마전 그가 한 토론장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샤리아 법(이슬람의 종교법 체계)을 영국내 거주 이슬람교도들을 위해서 현존하는 사법체계의 병렬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들끓었다. 대체로는 반박이었는데, 반박의 이유는 "종교가 법을 침해한다.(중세시대냐?)", 와 "반-여성주의적인 샤리아를 어떻게 공식화된 법에 포함시키는가?" 였다. 티비에서 그걸 보는 나는, 조금 부러웠다.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두 가지 관점이, 상식으로서, 논쟁들의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서로다른 신앙으로서 - 종교간의 관용, (성공회-그리스도교의 수장이 이슬람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였다. 단순히 한국에서 목사님-신부님-스님이 손잡고 환경운동하는 거랑은 다르다.) 둘은 종교적인 믿음과 법-행정의 이성적 구분. (샤리아법은 국가에서 처벌하건 하지 않건간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교의 권위로 반드시 그 신도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법제이다. 대주교의 말은, 법 외의 종교법을 두어 부정확한 판결들을 내어놓느니, 차라리 현 사법 체계에 그것을 포함시켜, 선택하는 사람들에 한해 그에 합당한 판결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주장의 옮고 그름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성적'인 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최소한 '서울을 봉헌'하지는 않지 않는가.)
- 지젝도 말한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이미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될 것이다." 강연을 같이 듣던 한 선생님과 동의한 것은 '우리'는 이후가 아니라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러고는 서로 마주보며 쓴 웃음.
- 다르다. 라고 말해버리기에는 뭔가 미진한 그런 점들이, 지금 '대한민국'이다.
추신. 그건 그렇다치고, '신이 우리를 돌볼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심이 부족'하면, 그 논리상으론 더 '사회복지'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