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폭력, 그리고 미래,

May 7, 2008

검찰과 경찰이 6일 '광우병 괴담' 수사에 본격 착수하면서 사법처리 대상과 범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수사당국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각종 유언비어와 괴담에 대한 수사는 법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대검찰청 관계자는 "최근 '나훈아 괴담'도 경찰이 수사한 바 있고 이른바 '찌라시(전단지)' 등 근거 없는 정보 유통에 대한 사법처리 사례도 있는 만큼 근원지가 밝혀진다면 처벌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수사당국은 우선 인터넷 ID와 IP를 추적해 괴담 유포자를 밝혀낼 계획이다.

그러나 수사당국의 의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인터넷 괴담은 여전히 확산됐다.

- 매일경제 '인터넷 괴담 이러면 처벌받는다.'

- 나훈아 괴담과 광우병 괴담은 몇몇가지 측면에서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파의 속도와 범위가 불특정하고, 그 시작을 알기 어렵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점은 그 피해자이다. 나훈아 괴담의 피해자는 나훈아 본인. 여기서 망가지는 것은 그의 '이미지=평판'이며, 이것은 그의 상품성에 영향을 미친다. 괴담에 대한 고발 및 수사,소송가 가능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광우병 괴담에서는 그 피해자가 '이명박 정부'이다. 이명박 정부의 이미지가 붕괴되는 건, 나훈아의 상품성이 붕괴되는 것과는 확연코 다르다. 나훈아의 경우는 그 이미지가 가지는 권리가 나훈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명박 정부의 경우에는 그 힘은 '이명박'이 아닌국민에게서 조금씩 양도된 '주권=권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사유재산과 공공(공유)재산의 차이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 우리집 정원에 어느날 듣보잡 한 분이 들어와서 뛰어노는 것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공공) 공원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고용한 관리인이 깨끗한 공원을 이유로 사람들의 공원출입을 막아버리는 것과 비슷한 논리인 것이다.

- 아우슈비츠도, 당대의 독일인들에게는 '괴담'이었다. 나중에 현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진저리쳤다고 한다. 허나, 세계는 그들에게 차가워왔다. 수십만명의 독일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또 수십만명이 살해당하고, 더 많은 수의 그들이 아사로 내몰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는 차갑다. 아직까지도 그 기억은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로 큰 영향을 미친다. '괴담'이 '사실'이 되면 그렇게 백여년간의 미래를 저당잡을 수도 있다.

- 모두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기본된 나라이며,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혹은 남한은, 그 구성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국가에 의한 국민의 통제가 매우 자연스러운 나라이다. TV 뉴스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군대 퍼레이드를 보고 남한인들은 완벽한 통일성에 치를 떨며 스스로 '자유대한'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긴다. 하지만 여기서 자유대한은 '이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명박이 明博하지 않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름은 어디까지나 이름에 불과하다. '바램'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 공권력에 의한 규제와 제제를 통한 위협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중국이나, 미국이나 - 50보 100보 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 그닥 다를것이 없다. 다른점은 한 쪽이 좀더 '세련된'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리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할 게 없다는 이야기다.

- 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할까? 벤야민은 말한다. '권력은 국민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 정권이 바뀌고 통치자의 이름과 그들이 정한 '정의'에 따라서 한 공간을 다스리는 정치는 달라진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보면, 결국은 누군가가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는 점 하나는 변하지 않으며, 이는 태어날때 부터 죽을때 까지 평생을 걸쳐서 경험된다. 따라서, 국민은 스스로를 국가-권력의 하부로 인식하게 된다. 원인을 상부에서 찾지 않고, 스스로의 주변에서 찾고스스로의 패배를 합리화한다. '위축'은 '우려'와 '공포'를 낳으며 결국 운명론적인 '죄의식'이 당연시여겨진다. 일종의 '노예근성'같은 것이 생기는 것이다.

- 이를 떨치고 나가기 위해서- 벤야민은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린다. 도래할 메시아를 통해 개개인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키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나는 그런 새로운 메시아가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왔으면 좋겠다' 하고 '올 것이라는 믿음'하고는 다른 문제이다. 왔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올 것 같아보이진 않다. 그렇다면 차선이 남는다. 스스로 '죄의식'을 움켜쥔 채, 스스로 할 수 있는 한 움직이는 것이다. 이에 반응하는 권력은 3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다음에는 찍어누르려 폭력을 휘두를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저항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생리이다. 그 이상에 이르게되면 차선의 승리이다. 메시아는 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더 나은 세상'이 온다.

- '우려'의 확산을 '괴담'으로 이름붙이고, '양도된 주권'을 '특권'으로써 행사하려는 권력은 이러한 '죄의식'과 '노예근성'에서 탄력받는다. 닥치고 모이는 여동생들에게- 그들이 슈퍼주니어 13명 얼굴과 이름이나 외우는 줄 알았던 우리 모두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미래를 어른들에게 저당잡히지 않기위해서 웃으면서 모이는 그들이, 어쩌면 나이 좀 먹었다고 방구석에서 투덜거리기만 하는 누구들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적어도 10대답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노예근성'에 휘말리지 않고 드높였지 않는가? 4.19때 학생들이 '우리에게 가르친대로 행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이명박도 한 켠에서 커다란 깃발을 메고 달렸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말을 곧이 믿는다고 해도, 어쨌건 그는 그 시절을 잊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배운대로 행할 생각이 없는 그의 정권은, 배운대로 행하지 않는 국민인 우리들에 의해 태어난 것이기도 하다. 희망이 교과서 그대로, 곧이 곧대로 소화시켜 믿고 있는 학생들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것은, 기쁜일이기도, 비극적인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반성은 우선 '지금'이 지난 후에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을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내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최소한'을 지키기위해 싸워야 할 시간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