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 이피, 여피 - 스티로폼과 선택의 시간
June 11, 2008
01.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미국은 그들의 아들 딸들의 행동에 당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대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눈초리는 존재해왔지만, 그 시대, 베이비 붐 세대들이 베트남으로 향해야만 했던 20대들의 반항은 조금 달랐다. 제임스 딘 혹은 '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그들 삼촌뻘들이 가죽잠바에 청바지를 입고 폭주를 일삼던것 과는 달리, 이들은 풀밭에 누워서 히히덕거리면서 흐느적 널부러지는 것으로 '꼰대'들에게 저항했다. 그들의 문화이자 종교였던 약도, 섹스도, 음악도 모두 십년전과는 달리 새로웠다.이들을 우리는 히피 Hippies 라고 부른다.
히피, 지금은 그렇게 기억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플라워 제너레이션 - '꽃의 아이들'라고 불렀다. 흐느적거리기는 했으되 할 말은 대체로 하는 편이었고, 할 말을 대체로 하는 편이었되 언제나 즐거워보였다. 옷은 허름하지만 넓디 넓은 품을 가진 편안한 것들이었고, 길게 기른 머리에는 꽃이 꽃혀있었다. 기타와 마리화나를 함께 품은 시위현장은 언제나 축제와 같았다고도 한다. 자유롭게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유머을 잃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로 '페가수스'라는 돼지를 입후보함을 선언하기도 하였고, 자신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그때는 미국 경찰도 꽤나 거칠었다)의 자녀들과 함께 소풍을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총을 든 주 방위군의 총구에 꽃을 일일이 꽃아주던 사진은 지금도 매우 유명하다. 생기로 가득찬 에너지는, 분노보다는 낭만에 가까웠던 것이다.
기성세대는 당황했지만, 어쨋건 그들에게 전쟁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거지떼'들 처럼 자리잡고 있던 히피들보다 훨씬 중요하였다. 처음에는 대학을 점거하고 소란을 피우던 이 아이들에 대해 '대응'하던 정부의 방침은 이내 '무시'로 바뀐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니 언론의 열기도 식는다. 약과 음악에 취한 채 몇년을 보낸 뒤, 많은 수의 히피들은 곧 자신들이 잊혀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 중의 몇몇은 '분노한 히피- 이피 Yippies'가 되었다. 정당을 만들고 무기도 들었다. 그들은 마틴 루터 킹 보다는 말콤 X를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에 꽃의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분노'가 아니라 '낭만'이었기에, 히피들 중 이피가 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물론 부조리는 여전했고, 악은 건재했다. 베트남 전쟁은 아직 한창이었고, 존슨-닉슨으로 이어지는 행정부도 큰 무리없이 굴러갔다. 결국 몇년을 걸친 소용돌이가 잔잔해지면서 히피들은 '평범해졌다.' 그들은 여전히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 하였지만, 그 자체로서 사회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들이 가진 돌출점이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면서, 그 날카로움과 신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려니..'라고 여겨지게 되면서, 그들의 목소리는 그것을 들어주는 귀를 잃게 된 것이다. 이제 많은 수의 히피들은, 이피가 되기 보단, 하나 둘,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대학의 기숙사로 돌아가기를 선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80년대 90년대, 이제 40대가 된 그들은 여피 Yuppies 가 된다. 여피는, 전문직을 가졌지만,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을 말한다. 키덜트, 웰빙족 모두 여기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겠다. 채식주의를 시작했고, ECM의 명상 음악들이 불티나게 팔리며, 요가와 불교가 사회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삶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히피시절을 잊지 않았으나, '남'이 아닌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삶의 가치'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20대의 모습과 달랐다. 지배계층은 그들의 등장을 환영하였다. 그리고 여피는 빌 게이츠, 빌 클린턴이 되어, 아버지들의 권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이라크를 침공한건 이들이다.
히피는 무엇을 이루어냈는가? 역사 연표중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낭만'이라는 단어를 끼어넣는데 성공했다. 누군가는 결국 히피가 외쳤던 것들이 대체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다. 물론 실제로 시대는 변했다; 전쟁도 끝났고, 그들이 그렇게 타도하고자하던 정부는 무너졌다. 하지만 닉슨은 그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충수로, 베트남전의 종전 역시, 많은 사람의 저항과는 달리, 결정적인 요인은 더이상의 '경제적 효과 없음'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그 때 이 애비가 말이야..'라며, '사랑'과 '평화'의 구호, 꽃의 여름을 기억하길 즐겼으나, 이라크전도, 코소보 침공도, 사실 모두 '어른'이된 그들이 주도/방조한 일이다. 세상은 변했지만, 아주 조금만 변했다. 히피의 저항은 '낭만'이라는 이름의 화석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꽃을 꽃았던 곳이 '총구'였음을 잊은채, 그 '꽃'송이만을 기억할 뿐이다. '사랑과 평화'라는 구호는, 흔한 레토릭이 되었다. 마치 '자유와 평등'처럼, 모두들 알고있지만, 아무도 진짜라고 믿지 않는 그런 종류의.
02.
'여피'와 '이피'사이, 선택의 시간은 이제 2008년 남한땅, 우리에게도 왔다.
낭만은 아름답다. 하지만 스티로폼을 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아닌가'에 달려있지 않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진짜 '즐거움'에 도달하는 것은 최선이었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선택은 '즐거운 방법으로'-수단을 유지하되, '즐거워 지자!'-라는 목적을 다소 흐릴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즐거워지기'-(목적을) 위해 '즐겁게 걸어왔던'-수단을 바꿀 것인가 둘 사이의 기로에 섰다. 민주주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의 절차를 믿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의 근본 정신인 '평등과 자유'를 믿는다는 것인가? 나아가, 그 믿음에 대한 책임을 질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는가? 우리는,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이 모든것은 물에탄 설탕처럼 녹아 밋밋한 단맛만을 남기게 될 지모르니-
아무 의미 없이 컨테이너 위에 대롱거리는 저 하얀 깃발처럼말이다. 저건 '스펙타클'을 의식한 '쇼'다. 천안문 광장으로 진주하는 탱크를 막은 1인의 사진이 될 순 없다.
[#M_참고로, |참고로, 물 건너 유럽에선 |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하게 약을 많이 하고, 더 많이 섹스를 했던 히피의 유럽 친구들은 보도블럭을 들어올려 던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부시-클린턴 행정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진보적인 블레어, 시라크 행정부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기억이란, 그 촛점이 어디에 잡히느냐에 따라 가족들과의 저녁식사에 등장하는 무용담에 그칠수도있고,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힌 채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2008년은 1997년을 기억할 것인지 1987년을 기억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그 방향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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