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비장소 _non-lieux de la memoire_

March 9, 2012

타카하시 : 예, ‘기억의 장소’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국민 국가의 역사를 생갈할 때 그 국민의 내셔널한 기억에는 특정의 장소가 특권적인 토포스(topos)가 되어 있다는 그러한 문제 의식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라면 개선문이라든가 바스티유라든가 혁명군이 반란을 탄압한 방데라든가, 프랑스인들의 내셔널한 기억이 여기에 각인되어 있다는 식의 그런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쇼아]의 감독 클로드 란츠만은 ‘기억의 비장소’(non-lieux de la memoire)를 말합니다. 즉 홀로코스트는 일어난 일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려는 가해자의 의도로 인해 오히려 장소 없는 기억이 되었다는 얘기지요. 특정의 장소가 토포스로서 있다면 그것을 상기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을 전부 말소하려 했던 것이 홀로코스트였다는 겁니다. 아우슈비츠에는 기념관도 남아있고 바라크(가건물)도 보전되어 있습니다만, 트레블린카나 베우제츠, 헤우므노 등의 수용소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 p.28

또 다른 생존자 장 아메리도 [죄와 벌의 피안]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제국은 당분간은 여전히 역사의 ‘업무상 과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역사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세계사에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던 극적인 세월과 비교할 때 그다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별로 다를 바 없는 제국 시대였던 것이다. SS의 제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사진이 방 안에 걸려 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대인 선별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실업자 문제의 획기적 성공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히틀러, 히믈러(Himmler), 하이드리히(Heydrich), 칼텐브루너(Kaltenbrunner) 등 나치 거물들의 이름은 나폴레옹, 푸셰,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와도 비슷해진다. 만일 같은 조건이었다면 세계 어디에서든지 일어났을 것이라고들 할 것이며, 실제로 그것이 독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독일 이외에서는 없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다. …… ‘만행의 세기’라는 정리로 결론을 맺는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구제받을 길 없는 자식들, 완고한 무리,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역사에 덤벼드는 반동가들이라는 것인가.”

  • p.46

—서경식&다카하시 테츠야,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9788987519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