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도, 셀 수도 없는
January 9, 2012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한 번 흐른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시간을 표현했다. 그는 어제의 인간이 오늘의 인간이 아니고 오늘의 인간이 내일의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될 나는 지금의 나를 닮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시간에 대해서 가장 숭배하면서 평온함을 느끼는 말은 보르헤스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명한 거다.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 가령 여기 온 세계보다 더 큰 어떤 존재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존재가 단 한 번에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블레이크의 말처럼 영원이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했기에, 우리는 그 엄청난 경험을 순차적으로 겪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낮과 밤, 시간과 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 기억과 현재라는 느낌과 아직 그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예감하거나 두려워하는 미래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절대적인 모든 것이 정말 지혜롭게도 우리에게 순차적으로 주어졌습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졸지에 한꺼번에 주어진다면 아마도 인간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 우주를 일시에 수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벅찬 일입니다. 쇼펜하우어도 이런말을 했지요. 다행히도 우리들의 생은 밤과 낮으로 나뉘어 있고, 또 그러 사이에 잠이 끼어든다고 말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다가 다시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죠 […] 존재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정말 다행스럽게도 시간 덕분에 우리에겐 모든 것이 단계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전기]
보르헤스는 시간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시간보다 괴로웠던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저에게 시간은 주로 기억 속에 존재합니다. 현재는 항상 요동치고 괴로움을 주지만,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음의 고요는 결코 현재 속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현재는 항상 불안정하고 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 삶이란 너무나 가련해서 역설적으로 불멸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인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망각과 시간으로 만들어졌었습니다. 어쩌면 멜로디 한 소절보다 짧을지도 모르는 인간은, 결국 시간일 뿐입니다.
-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전기]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영원히’란 말 대신에 ‘영원하고도 하루’란 표현을 더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다. […] 그때는 영원에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결국은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걸 얼마나 믿고 싶어 했던가? 망각과 시간에 대해 고민을 하던 보르헤스는 우리에게 ‘더욱 절박한 문제는 시간이나 죽음보다 오히려 사랑이 아닐까요?’ 하고 말을 건넨다.
[…]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되지요. […]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호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그러니까 정원을 가로지르던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시간은 헤아릴 수도, 셀 수도 없는 미래를 향해 영원히 갈라지고 있다.
— 정혜윤, 런던을 속삭여줄께, (9788971848227) p.258-260